❙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22-오월에 묵상하는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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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22-오월에 묵상하는 ‘아버지와 아들’
글/그림 황학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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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신보 기자 작성일23-05-2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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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추방과, 노아시대 대홍수로 인류의 멸망과, 사해남부지역의 다섯 도성의 멸망 등, 하나님과 인간과의 참담한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니, 하나님의 슬픔은 분노였을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홍수로 멸절하심으로써 한 세상이 지나고서 ‘노아’의 가족에서 시작하는 또한 세상이 펼쳐졌다. 새로운 그 세상도 초장부터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불길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마저도 파국에 대한 예고였을까? 에덴동산에서 창조주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파국이 아담의 배역이었던 것처럼, 홍수후의 세상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한 아들의 불경이 파국을 초래할 것이 예견된다. 그렇듯 아버지와 아들로써 노아와 ‘함’의 관계에는 파국을 맞은 하나님과 아담관계가 투영되어 있다.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한 노아는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고, 때마침 장막에 들어온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지 않고 떠벌렸던 것이다. 형제들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장막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고, 술이 깬 노아는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했다. 

“가나안은 저주받아 제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

 함이 항변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하체를 드러내놓고서 왜 내 아들을 저주하십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애꿎은 손자에게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니요.” ‘자식사랑’은 모든 동물에 내재된 본성이지만, ‘부모공경’만큼은 하나님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더해진 본성이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했다. 그러므로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어불성설이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를 탐했던 천사가 사탄이었던 것처럼, 함이 아버지를 대등한 관계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의 가증함을 노아는 저주했던 것이다. 

엄위하신 그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어 침묵으로 건너 띄었던 하나님을 예수께서는 ‘아빠, 아버지’로 부르셨다. 그러나 사랑만을 추구하는 세태는 오직 ‘사랑의 하나님’만을 전하고 찾는다. 아버지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어서 ‘홍字, 길字, 동字’ 하며 한자씩 글자로 알렸던 그간의 관습은 차치하더라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야 자연스러운 것이 오늘날세태 아닌가. 아빠에 대한 믿음은 있어도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축복과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어도 경외의 하나님은 낯설고 불편한 하나님이다. 그렇듯 아빠는 있어도 아버지는 잊혀 진 시대, 아빠로는 살면서도 아버지로서는 공경 받지 못하는 시대에 아버지로서 고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고독일 것이다. 

그렇듯 아직도 아들을 저주해야 할 만큼 분노한 노아를 이해할 수 없어서 “아니, 그깟 일 갖고 아비가 자식에게 험한 저주를 퍼붓다니……” 내심 함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장차 만연할 가나안족속의 패악이 이스라엘의 칼에 진멸될 것과, 그 뒤를 이어가는 세기적 종말현상에 대한 묵시다. 가정의 달 ‘오월’이면 아버지로서 아들을 저주해야 하는 노아의 슬픔에서, 아담을 내쫓아내야 했던 하나님의 슬픔이 지구를 덮는 대홍수였음을 상기케 한다. ‘가인’에게 맞아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아담에게 ‘셋’을 주셨다한들, 종국에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야 했던 타락상의 재현은 종말을 재촉하는데······. 오월이면 애달픈 청원의 패러독스, “아멘, 마라나타(Maran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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