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21-환향녀(還鄕女)를 겨냥한 돌팔매
글/그림 황학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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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신보 기자 작성일23-05-11 16:39본문
조선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무덤을 지키고도 살아생전 상복을 벗지 못했다. 유교사회에서 여성은 그런 존재였다. ‘부르카’니 ‘차도르’니 거론한들 무엇하나. ‘삼종지도(三從之道)’, ‘불경이부(不更二夫)’, ‘일부종사(一夫從事)’, 마을 어귀에 세워 둔 ‘열녀문(烈女門)’마저도 여성을 겹겹이 둘러씌운 검은 부르카였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50만 여성, 많고 많은 여인들은 속전(贖錢)을 치루고 환향했다. 임금은 그들이 한양에 들어오기 전에 ‘연신 내’ 개울물에 몸을 씻으면 그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아량을 베풀었었다. 여성이 치른 곤욕자체가 죄였다는 논리였던 거다. 그렇듯 임금과 양반들은 첩을 두고 살지라도 오랑캐에 붙들려갔던 여인들은 무엇으로도 씻지 못할 죄인이었지.
유교경전 도덕률은 그나마 살아 돌아온 아내를 이혼으로 내치고 친가마저 멸시했던 강퍅함이었다. 그 후로는 해마다 처녀 50명을 청나라에 바쳤다. 그런데, 그보다 1천 여년 전 복음서에 성직자 한 무리가 간음하던 여인을 붙잡아 예수께 끌어온 사건이 나온다.
그들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증서를 주라’는 모세의 말꼬리를 잡고 어떨 때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예수께 따져 묻던 자들이다. 그들이 마침 간음하던 여인을 붙잡아왔다 “모세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하는데, 당신은 뭐라 말할 건가?” 돌을 움켜쥐고 다그쳤다. 그러자 예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글에 쏠렸고, 예수께서 마침내 입을 여셨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들은 돌을 버리고 황망히 떠나갔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오고도 버려둔 채 되돌아가다니, 율법모독이다. 예수를 고발할 절호의 기회마저 저버리고 돌아선 까닭이 단지 그 말씀 한 마디였다면, 그 또한 어불성설이다. 요한은 그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기술하며 땅에 적은 글을 묵언으로 감춘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위기 20장 10절)
반드시 쳐 죽여야 할 간부는 빼돌리고 여자만 붙잡아온 저들이야말로 정녕 돌 맞아 죽을 자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경배케 함으로써 3천명을 찔러 죽여야 했던 그들 조상 ‘레위인’들처럼(출 32:27,28) 저들도 서로를 향해 죽기까지 돌팔매질을 해야 하나? 막상 여인의 죄에 돌을 던지려니 차마 양심에 찔렸던 거다. 저들이 모두 떠나자 예수께서 선고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
우리 선조들은 자기들이 지키지 못해 강탈당한 아내와 딸들에 양심은커녕, 유교경전에 덜미 잡혀 ‘삼종지도(三從之道)’, ‘일부종사(一夫從事)’, 모진 돌팔매를 서슴지 않았다. 임금이 청나라칙사에게 삼배 삼고두례(3拜三叩頭禮)하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던 그때까지 그랬다.
대다수가 소작농민으로서 그나마 여성이 이름을 얻었던 때는 민적법(民籍法)이 제정된 이듬해 일제에 합병당하고서였지. 일본식으로나마 수줍은 그 이름, ‘영자’(英子/에에코), ‘미자’(美子/요시코), ‘춘자’(春子/하루코), ‘순자’(順子/주코), ‘명자’(明子/아키코)······.
해방이 되자 ‘친일파’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더니만, 서글픈 어머니와 누이이름을 잊었던가. 율법에 사로잡혀 죽음의 자리에 끌려왔던 그 여인이야말로 엄위하신 심판주 앞에 서게 될 너와 나의 표상이었음을.